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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 운명 바꾼 맨발투혼… 박인비·신지애 등 수많은 ‘세리키즈’ 낳아[최우열의 네버 업-네버 인] / 최우열(스포츠교육학과) 겸임교수
김은지 25.06.10 조회수 17

 

■ 최우열의 네버 업-네버 인
1998년 US여자오픈

박세리, 92번홀 접전 끝 우승
외환위기 겪던 韓 국민 위로
통산 25승으로 명예전당 헌액
‘골프는 귀족 운동’ 인식 깨고
국가적 ‘골프붐’ 이끈 계기로

朴과 명승부 펼친 추아시리폰
2년만에 프로 접고 간호사로

 

최근 미국 위스콘신주 에린의 에린 힐스 골프 코스(파72)에서 열린 제80회 US여자오픈이 스웨덴의 마야 스타르크(25)의 우승으로 끝이 났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156명의 골퍼 중 한국 선수는 25명으로 39명인 미국 다음으로 많았다. 지금까지 한국은 이 대회에서 모두 11차례 우승했는데, 2020년 김아림의 우승을 끝으로 더는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한국의 첫 우승은 잘 알려진 대로 1998년 박세리가 거둔 것이었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실의에 빠져 있던 국민에게 박세리의 우승은 많은 위로와 함께 ‘다시 할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줬다.

 

4라운드를 마쳤을 때 박세리는 단독 1위로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스무 살 동갑내기이자 당시 듀크대 2학년이던 아마추어 선수 제니 추아시리폰(미국)이 마지막 18번 홀에서 불가능해 보이던 12m 거리의 버디 퍼트를 극적으로 집어넣으면서 두 사람은 공동 1위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무승부로 경기가 끝나면 이튿날 다시 18홀의 연장전을 치러 승부를 가려야 했다. 17번 홀까지 두 사람 모두 1오버파로 팽팽한 승부가 계속되던 가운데 연장전 마지막 홀에서 박세리의 티샷이 페어웨이 왼쪽 워터해저드 방향으로 굴러 들어갔다.

 

다행히 물에 빠지진 않았지만 공은 깊은 러프에 살짝 걸려 있었다. 높은 탄도의 샷으로 자신의 키만큼 되는 해저드 턱을 정확하게 넘겨 페어웨이로 공을 보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자칫 경기에 패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에서 박세리가 침착하게 신발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 공을 바깥으로 쳐내는 장면은 큰 감동과 함께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18홀의 연장 혈전 끝에도 승부를 가리지 못한 두 사람은 또다시 서든데스 방식의 연장전을 치러야 했다. 두 번째 연장전 첫 번째 홀에서도 두 사람은 나란히 파를 기록하며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다음 홀에서 추아시리폰은 6m 길이의 버디 퍼트를 아슬아슬하게 놓쳤지만, 박세리는 5.5m짜리 버디 퍼트를 성공시키며 장장 5일에 걸친 기나긴 92홀의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박세리는 이후 승승장구하며 메이저대회 5승을 포함해 통산 25승을 거뒀고, 2007년에는 골프 선수로는 최고의 영예인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역대 최연소로 헌액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아깝게 박세리에 패했던 추아시리폰은 대학 졸업 후 프로에 데뷔했으나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하다 2년 만에 프로 생활을 접었다. 이후 간호학과에 진학한 그녀는 석사 학위를 마치고 의사와 결혼한 뒤 현재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박세리의 우승은 한국 사회에 많은 변화를 불러와 오랫동안 일부 특권층이 즐기는 귀족 스포츠로 인식되던 골프가 점차 전 국민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대중화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전까지 골프의 존재조차 몰랐던 많은 사람이 박세리의 우승을 지켜보며 골프라는 스포츠를 알게 됐고, 이를 계기로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골프 배우기 붐이 일었다.

 

이뿐 아니라 골프연습장마다 박세리의 성공에 고무되어 어린 자녀들에게 골프를 가르치려는 부모들로 넘쳐났고, 박인비·신지애·최나연 등 이른바 ‘세리 키즈’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한국의 세계 여자 골프계 평정이 시작됐다.

 

이듬해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이 박세리의 우승으로 촉발된 골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정부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골프 대중화 선언’을 하면서 골프장 건설이 줄을 이었다.

 

한국골프장경영협회에 따르면 박세리가 우승하던 해인 1998년 97개에 불과하던 한국의 골프장 수는 2024년 말을 기준으로 524개에 달한다. 해마다 골프장을 찾아 골프를 즐기는 이용객 수 역시 1998년 704만 명에서 2024년 4741만 명으로 6배 넘게 늘었다.

 

국민대 스포츠산업대학원 교수, 스포츠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