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자에 대한 재평가에서 나오는 화려한 수사학처럼 김추자가 항상 그런 대접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김추자의 이미지는 신중현, 이장희, 윤형주 등 70년대 한국 대중음악사의 걸출한 인재들을 단죄했던 독재정권의 마수걸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박정희정권의 용어로 번안해보자면 그건 퇴폐와 불온이었다. 정치, 사회, 노동 등의 다른 분야에서도 그러했지만, 이들을 단죄하는 기준은 지극히 자의적이지만, 정치권력의 화신이었던 그들의 행태는 더할 수 없이 졸렬하였고, 폭력의 강도는 무시무시했다. 하긴 김추자를 두고 창법 미숙이라는 코미디 같은 단죄가 덧붙여지기도 했으니 그들이 무얼 못했으랴. 그럼에도 김추자에게 덧씌어진 마수걸이는 강력하게 작용했다. 퇴폐와 선정 같은 것 말이다. 퇴폐와 선정, 대마초 가수라는 주홍글씨는 청년 대중문화 기수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흔을 각인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 무의식적 편견과 거리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대마초가 주홍글씨로 둔갑한 것도 정치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사실 그 시절로 돌아가보면 대마초는 별다른 법적 제재 없이 담배 피우는 수준으로 받아들여지던 일상적 문화의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대마초는 퇴폐 및 정신병과 같은 말이 되었다. 75년 대마초 파동에서 신중현을 비롯한 다수의 연예인들을 정신병원에 수용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대마초를 앞세운 마녀사냥의 결과는 한국 대중음악사의 빛나는 한 획을 긋고 있던 청년 대중문화의 초토화 그 자체였다.
독재정권은 유신헌법과 새마을운동, 반공시책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일체의 문화를 퇴폐와 불온한 문화로 규정했다. 치마 길이와 머리카락의 길이마저 공권력으로 다스리려 했으니 이들의 눈에 청년 대중문화가 어떻게 비췄을지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 폭압성이 워낙 전면적이고 강도가 세 미처 그 폭압을 제대로 인식할 겨를도 없었거니와 몸을 사리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그후 그들은 어떤 공적 공간에도 출현하지 못하고 지하로, 고향으로, 미국으로 잠적하고 흩어졌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기에는 70년대 그리고 뒤이은 80년대의 정치적 상황이 이들에 대한 어떤 눈길도 허용할 수 없었다. 정치적 폭압에 맞선 민주화 투쟁에서도 이들의 희생은 부차적인 혹은 개인적인 몫으로 남겨져야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치 그들을 삶에서, 기억에서 지운 듯 잊었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이들에게 덧씌어진 죄목들을 요즘의 말로 다시 해석하자면 파격, 해방, 솔직함, 일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 그 숨 막히는 공간에서 김추자는 거침없는 목소리로, 파워풀한 율동, 과감한 패션으로 대중들에게 활력과 역동성, 거침없음, 솔직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했다. 그것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보기 드물게 생동하는 문화의 주체적 개화이자 민주적 발로였지만, 무시무시한 유신의 밤 속에 묻히고만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